커미션 백업

[자크데르]

너덜너덜해진 튀김 2026. 1. 26. 17:18

 
 
 

포스타입에서 차인(크레페 아이디:@chwain71)님께 맡겼던 커미션입니다

세기말 홍콩AU 데자크x데르온

 


 
 

 
 
9월 홍콩의 살벌한 날씨는 새벽 3시 무렵의 공기마저 무겁게 만들었다. 카메라 렌즈에 습기가 서릴 듯한 열대야 속, 심야 우체국을 지키고 있는 한 근무자가 담배를 물었다. 카키빛 셔츠는 땀에 젖었어도 제복 바지만큼은 구겨지지 않고 반듯하단 점에서 그의 깔끔함이 드러났다. 종이 냄새 사이로 밴 기계의 기름 냄새, 오래된 필름처럼 깜박이는 형광등. 남자는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한 채 우편 분류기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짧고 검은 머리칼이 깜박, 한 번의 소음에 드러났다가, 다시 깜박, 다음 장면에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춘다. 번잡한 조명에도 그의 선명한 적안은 봉투 겉면의 주소를 빠르게 잡아냈고, 적지 않은 수의 봉투가 흐트러짐 없이 정리됐다. 평소처럼 규칙대로 잘 정돈된 우편물들을 감상한 남자가 채 타지 않은 담배를 손에 들고 훅, 숨을 뱉었다. 외로운 근로자의 한숨이 하얀 연기로 흩어졌다.

 희미하게 웅성이던 라디오 볼륨을 확 높인 건 직후의 일이다. 남은 일이라고는 새벽에 오는 몇 안 되는 손님을 맞이하는 것뿐인 데르온이 의자에 몸을 묻고 심야 라디오 방송국으로 주파수를 조절했다. 이젠 오랜 친구보다도 익숙해진 목소리가 전자파를 타고 공기 중에 흩어졌다. 새벽의 흐름에 걸맞게 나지막한, 어쩌면 조금 나른하기까지 한 톤.

 [오늘 밤공기는 꼭 오래된 기억처럼 눅눅합니다. 창문을 열면, 바람보다도 씁쓸한 무언가가 심중에 남을지도 모릅니다.]

 적막을 부드럽게 가른 몇 마디에 데르온은 깊이 생각할 것 없이 책상 맞은편으로 작게 난 환풍용 창문을 열었다. 정체된 공기 탓에 옅은 바깥 풀 내음이 들어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새벽 라디오마저도 나지막한 인사와 함께 끝나버리고, 그로부터 괜한 심상이 머리를 괴롭히기 시작했을 때. DJ의 말처럼 둔중하고 습한 무언가가 그의 가슴을 누르고, 풀벌레 우는 소리가 아득히 멀어질 때······. 데르온은 수마에 빠진 것처럼 나른해졌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잠을 깨워 미안하군. 우편 하나 맡길 수 있나?"

 '적막을 부드럽게 가르는' 목소리가 문 너머 들릴 때까지.

 손님의 우려와 달리 그는 졸고 있지 않았다. 깊은 수렁 밑으로 정신을 내던질 듯 말 듯, 딱 졸지 않을 만큼의 외줄타기를 즐기는 건 이 새벽 근무자의 오랜 악취미였던 까닭이다. 데르온은 몸을 일으켜 우체국 입구로 다가갔다. 키가 큰 그보다도 시선이 조금 더 위에 있는 남자가 보였다. 데르온은 그 손님을 이미 알고 있었다. 길지 않은 시선 교환 직후 물었다.

 "급송입니까?"
 "일반으로 충분하다."

 늘 그렇듯, 일반 우편. 또한 늘 그렇듯, 오늘 라디오에서 들은 목소리. 스튜디오에서 막 나온 사람처럼, 남자의 목소리에는 방송의 잔향이 남아 있었다. 데르온에게 매 새벽 4시를 넘어서야 찾아오는 이 군청색 장발의 손님은 이제 익숙한 일이었다. '데자크'. 늘 보는 발신인 주소지에 달려 있던 이름을 속으로 발음하며, 그는 얇은 갈색 봉투를 건네받았다. 봉투의 무게를 재는 저울의 바늘이 찌르르 울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언제나 같은 정적이 흐르고, 우체국 직원은 이 말을 건넬지 고민한 게 벌써 3번째를 기록한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야 느리게 입을 열었다.

 "이름을 잘 짓는다고 들었습니다."
 "···나를 아는 사람이군. 청취자인가?"

 홍콩인에게 본래의 이름을 두고 성인이 되어 영어 이름을 새로이 짓는 건 퍽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므로, 좋은 영어 이름을 짓는 덕목은 남들의 주목과 동경을 받기 마련이다. 데르온은 긴 명맥을 유지하는 데자크의 새벽 라디오를, 정확히는 그 속에서 쭉 한 코너를 차지하고 있는 작명 활동을 떠올리며 침묵했다. 퍽 유연하게 당신을 안다고 시인하는 데르온의 화법에 데자크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표정을 놓치지 않은 덕분에 데르온은 그가 값을 치르고 우체국으로부터 몸을 돌릴 때쯤, 약간의 아쉬움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금방 떠날 것 같던 데자크가 우뚝 멈춰서더니 뒤돌았다. 꼭 잊은 게 있다는 듯 그가 물었다.

 "자네는 이름이 뭐지?"
 "데르오느빌입니다."
 "좋은 이름이군."

 짧게 수긍하는 데자크를 두고 약간의 기대를 품었던 데르온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

 "당신이 지은 이름입니다."
 "그랬나."

 무신경한 대화를 두고 데자크는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넘겼다. 새벽의 무더위가 두 사람 사이 공기마저 눅진하게 만든 탓이다. 형광등만이 고요하게 윙, 하는 소리를 내고, 우편물에 스탬프를 찍은 데르온은 시선을 돌렸다. 열린 창문 너머로 네온사인이 반쯤 꺼진 거리가 보였다. 홀린 것처럼 함께 그 풍경을 일별했던 손님이 마침내 뒤돌았다. 그러나 평소와 다른, 이런 마무리 말 하나와 함께.

 "내일도 이 시간이겠군."

 침묵하는 '데르오느빌'을 두고 그는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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