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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류데르]청람윤회

너덜너덜해진 튀김 2025. 8. 12. 00:12

 

트리거 요소:사이비, 유혈 묘사

크레페에서 레이 @lilioz께 맡겼던 커미션입니다. 

 

(부제:4천 자를 주문했는데 1만 4천 자가 온 건에 대하여)


 

 

 

하늘은 너무도 파랬다.

 

 

농도 짙은 파란색이, 마치 이 세상 바깥에서 꺼내온 색처럼 내려 앉아 있었다. 색이 너무 깊어 오히려 환했다.

 

보는 순간 이마 위가 지릿하게 얼얼했고, 눈을 가늘게 뜨지 않으면 눈물샘이 찔릴 정도였다. 하지만 늘 그들은, 또는 그는, 그 하늘을 맑다고 지칭했다. 날씨가 좋다고, 아무렇지 않게. 하늘은 파랗다 못해 눈이 아플 만큼 맑았고, 그 속에선 무언가가 뒤집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나는 지금, 하늘 안쪽을 보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매미의 울음소리가 쩌렁쩌렁하게 귀를 파고든다. 매미 소리는 아침부터 쉬지 않는다. 처음엔 귀 옆을 긁고 지나가는 소리였다가, 점심 무렵이 되자 안쪽 어딘가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것이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였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내 귀 안에서 나는 건지, 아니면 뇌 속에서 진동하는 건치조차 헷갈릴 만큼 소리는 단단한 벽처럼 공기 위에 눌어붙어, 어느새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여름 햇살은 잔인할 만큼 뜨거웠다. 벽에 반사된 열기와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증기가 뒤섞여, 모든 풍경이 조금씩 흔들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세상이 조용히 진동하고 있었다. 그 진동은 처음엔 눈에 띄지 않지만, 곧 발끝에서 시작해 다리, 손끝, 턱끝까지 파고들었다. 가만히 있어도 몸이 안에서 흔들리는 느낌. 정수리를 태우는 볕은 뇌 속까지 태워 왔고, 들숨은 덥고 눅눅해 그 자체로 토할 것 같았다.

 

 

푸른 하늘이 고요하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건 멀미를 부르는 색이었다.

 

 

아니, 멀미라기보다… 어딘가 잘못된, 파형에 계속 노출된 듯한 어지러움.

 

햇빛이 유리창을 타고 들어와 바닥을 긁었다. 바람은 뜨겁고, 숨은 무거웠다. 그럼에도 교복 깃을 매만지는 손놀림은 습관처럼 차분했고, 종이 울리면 또 다음 교실로 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런 평온함에 어울리지 못한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너무 푸르고, 너무 조용하다.

 

빙글빙글 도는 날벌레들 사이로 들려오는 매미 소리—

 

 

그건 누군가의 기도처럼, 혹은 징벌처럼,

 

지독하게 반복되고 있었다.

 

 

 

 

 

 

 

 

 

 

 

 

 

이곳의 여름은 참 빨리도 내려앉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온은 이미 입하가 시작되기 전 봄부터 제멋대로 올랐고, 풍경은 그보다도 먼저 여름으로 굴고 있었다. 학교 담벼락 아래로는 잡초들이 무성했고, 교실 창밖으론 뽀얗게 익어가는 논이 나지막이 펼쳐졌다. 멀리선 트럭 한 대가 천천히 지나가며 먼지를 날렸다. 운동장은 흙냄새로 가득했고, 나무 그늘 아래로는 물을 튀기며 돌아가는 자동 급수기의 리듬이 느릿하게 이어졌다.

 

 

시계는 오후 두시를 막 넘긴 참이었다.

 

그 시간의 햇볕은 예민하고, 강했고, 무언가를 천천히 지우는 듯, 혹은 태워서 없애버리는 듯한 기세로 모든 사물을 덮고 있었다. 그래서 교실 안에 앉아 있어도, 여름은 내 몸을 통째로 감싸는 것처럼 느껴졌다. 덜덜거리는 소리를 내는 낡은 선풍기 하나로는 턱없이 부족한 여름이었다.

 

나는 창가 쪽의 맨 뒷자리에 앉아 책장을 넘기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창밖에서 무언가 시선이 느껴졌던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저 시야가 끌렸을 뿐인데———

 

운동장의 끝, 야외 수돗가 쪽에 서 있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카류안이었다.

 

그는 교복 윗단추를 하나 풀고, 소매를 반쯤 걷은 채 물을 마시고 있었다. 정수기처럼 생긴 회색 수도가 옆에 서서 손바닥을 컵으로 삼아 입술에 가져다 대는 동작이 어딘지 익숙했다. 그 모습은 묘하게 단정했다. 어지러운 여름 속에서 유일하게 흐트러지지 않은 조각처럼, 풍경에서 유독 또렷하게 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잠깐, 눈이 마주쳤다. 별다른 표정은 없었다. 평소처럼 손을 흔드는 기색도 없었고, 그저… 무언가를 인식하는 듯한 얼굴. 내가 이곳에 있었다는 걸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처럼.

 

나는 시선을 피한 채 책을 덮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운동장은 비어 있었다.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수돗대는 말라 있었고, 카류안의 그림자도 남아 있지 않다. 무심코 시계를 보았다. 몇 분이 지난 걸까. 그런 생각이 들 즈음, 의심도 들었다. 애초에, 눈이 마주친 게 맞긴 할까.

 

여름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어, 교실 안 공기가 묘하게 출렁이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파랬고, 매미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린 건, 그보다 조금 뒤의 일이었다.

 

수돗가의 물로 손을 헹구고 물을 한 모금 삼킨 후 고개를 들자, 나무 그늘 너머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카류안이었다. 나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등나무 그늘 아래, 오래된 벤치에 앉아 무릎 위에 책을 펴 놓고 있었다. 교과서는 아니었다. 두껍고, 표지에 먼지가 앉아 있을 것 같은 고서처럼 생긴 책. 그는 손가락으로 글자를 따라가며 천천히 읽고 있었다. 왠지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괜히 주변을 둘러봤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고,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무슨 책이지?”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어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 웃음은 딱 교과서에 나올법한 웃음이었다. 선배를 대하기 좋은 후배의 웃음. 정중하면서도 예의 바른 것 같기도 한데, 지나치지 않게 상냥한.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표정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웃는 법을 훈련받은 사람처럼. 그리고 이상하게도, 나는 그 순간이 낯설지 않았다.

 

 

“무슨 책일 것 같아요?”

“…글쎄, 무지 두꺼워 보이는데.”

“별건 아니에요.”

 

 

말은 평범했지만, 어딘가 맥이 빠진 말투였다. 그렇다고 느슨한 건 아닌데, 속도가 일정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걸 따라 맞췄다. 그는 웃음을 풀지 않은 채 책을 덮었다. 「…끝에는」책 표지에는 그런 글자가 적혀있었다. 일부는 그의 손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마지막의 큼지막한 글자는 그리 유추해 볼 수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책이었다.

 

 

“사람들이 뭐라고 믿든 간에, 문장은 재밌잖아요. 의미를 정해두고 쓰는 글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아 무어라 대답할 수 없었다. 정색하는 것도, 농담하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조차 불편했다.

 

 

“선배는, 믿는 거 있어요?”

“믿는 거라니?”

“…운세라던가, 징조라던가, 미신 같은 거 있잖아요.”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런 미신 같은 것을 따지는 성격은 아니었다. 운세를 하루마다 보는 게 귀찮기도 하고…… 무엇보다 잘 맞는 점괘는 없다. 그런 이상에만 안주해서 살아가다간 현실을 놓쳐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설명해 봤자, 들을 리는 없겠지.

 

 

“미신 같은 거 안 믿어.”

“그래요?”

 

 

그는 가볍게 웃었다. 그 웃음엔 어딘가 장난기 섞인 어투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게 선배를 흔들리게 만들면 어떡할 거예요?”

“뭐?”

“그냥, 농담이에요.”

 

 

그는 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엔 좀 더 가벼운 이야기로 말 걸게요. 오늘은, 그냥 인사 정도로.”

“…보통 인사를 꼭 미신 같은 이야기로 하나?”

“특별한 날이니까요. 오늘은, 선배가 처음으로 저한테 말 건 날이잖아요. 그래서 무슨 이야기라도 꺼낸 거예요.”

 

 

그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돌이켜보니, 정말 그랬다. 어찌 보면 사적으로는 내가 처음으로 말을 건 셈이었다. 그는 그 말만 남기고 조용히 걸어갔다. 다시 햇볕 속으로. 더운 공기와 매미 소리의 안으로. 나는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그가 사라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만 보면서. 왠지 그 순간이, 여름의 한가운데 같았다. 너무 평범하고, 뜨거운 하루.

 

그러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그런 날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 들려있던 책, 그건… 분명, 며칠 전에도 학생회실 어귀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책이었다. 당시엔 누가 두고 간 건지 몰랐고, 그냥 오래된 것 같아 치워 버렸던 것 같은데.

 

——그 당시엔 그저, 아끼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수 있다고. 그럴 수도 있지, 하고.

 

 

 

그날 이후로 카류안은 가끔, 아주 느슨한 빈도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언제나 조용히 다가와, 꼭 필요하지 않은 말을 했다. 학생회실 복도에서, 수돗가에서, 도서관 창가에서. 날씨 이야기나 시험 범위, 방학 같은 별 쓸데없는 이야기들도 있었고, 정말 의미 없는 인사도 있었다. 그 말들은 늘 타이밍이 절묘했다. 내가 잠시 멍하니 있거나, 입을 다문 채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을 때, 무방비한 순간 딱 그때만큼의 거리에서—

 

 

“오늘같이 더운 날엔 말이에요, 사람 마음도 빨리 익는대요.”

 

 

어느 날은 그런 말을 했다.

 

“선배는 덜 익은 쪽 같아요. 딱딱하고, 신맛 날 것 같은.”

 

 

그는 그렇게 말해놓고 혼자 웃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바보 같기도 하고, 속을 알 수 없기도 하고.

 

 

“…그런 말, 아무한테나 하는 건가?”

“글쎄요. 그러면 오해받기 좋지 않을까요.”

“지금도 충분히 오해 살 만한데.”

“뭐…오해해도 괜찮아요. 정정하는 재미가 있으니까.”

 

 

그의 말은 무례하기보다 당돌했고, 선을 넘는다기 보단 맹랑했다. 하지만 정중한 단어 속에 섞인 그 느릿한 말투와, 말끝에 흐르는 여유는 어쩐지 나를 비집고 들어오는 불쾌감이 있었다. 쨍한 한여름 속의 습도 같은, 그런 불쾌감. 그런데도, 그 감정은 곧잘 웃음 섞인 한숨으로 끝났다.

 

그러니까, 정말 교묘했다.

 

 

그러다 어느 날엔, 점심시간이 지나 도서관 계단 아래에서 그를 다시 마주쳤다. 그는 도서관 계단에 앉아 있었고, 책 한 권을 펼쳐놓고 있었다.

 

 

“선배.”

“너는 또…”

 

 

나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고개를 들었다.

 

기다렸어요.

 

그는 짤막하게 한마디를 하며 한 손으로 인사를 했다. 나는 인사에 대한 별다른 대답 없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게 인사에 대한 대답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책을 한 권 드리려고요.”

“독후감 과제야?”

“아니요.”

 

 

그는 조용히 웃었다.

 

읽고 나면, 좀 더 이야기가 잘 통할 것 같아서요, 선배랑.

 

그는 그리 말하며 내게 책을 건넸다. 책 표지는 낡았지만, 제목은 비교적 평범했다. 문학 전공 학생들이나 고전 독서 모임에서나 좋아할 법한 종류. 나는 책을 받아 들고 아무렇게나 펼쳐 눈에 띄는 한 문장을 속으로 읽어 보았다.

 

 

「끝이 처음을 삼키고 처음이 끝을 낳느니라.

그 고리는 풀리지 아니하고, 그 소리는 잠들지 아니하리라.」

 

 

처음에 든 생각은, 대체 이게 무슨 내용이지? 였다. 처음부터 본 게 아니어서 이해가 안 되는 걸까, 싶어 책을 조심스레 살펴보다 그에게 물었다.

 

“이거, 혹시 그때 네가 읽고 있었던 그 책인가?

“아뇨, 그건 비문학이었고요. 이건… 감성 회복용이요.”

“…이상한 말을 자연스럽게 하지 마.”

“이상하지 않아요. 선배에겐 이런 게 필요할 것 같아서요.”

 

 

그는 천천히 말을 덧붙였다.

 

 

“사람들은 자기 감정도 잘 못 느끼잖아요. 뜨거운 곳에 살면서, 정작 더운지도 모르고.”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그게 느껴지나?”

“그럴지도 모르죠. 아니면, 제가 그렇게 만들어볼 수도 있고요.”

 

 

속을 알 수 없는 웃음만 내비친다. 나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뭘 바라는 건지 알 수 없는 말투였다. 뭐 하나 확실하게 말하는 것이 없고, 다만 그렇게 이상한 지점도 없다는 것이, 그리고 의심이 들지 않을 정도인 그의 친절함이 그를 더 이상하게 만들었다.

 

“이따가, 시간 괜찮아요?”

 

잠깐이면 돼요. 독서 모임 비슷한 거예요. 제 친구들 몇 명이랑.

 

독서 모임?

 

나는 되물으며 책을 한 손으로 쥐었다.

 

 

“ 네, 그게 설명하기 제일 편해서요.”

“…독서 말고 다른 거라도 한다는 건지.”

“뭐, 독후감이라도 쓰실래요?”

 

 

나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는 다시 웃어 보였다. 마치 그 표정을 즐기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의무적인 모임은 아니니까요, 선배가 오면 알아요. 수업 끝나고요.”

 

 

나는 한 손으로 책을 턱에 툭 걸쳤다.

 

수락하는 것도 마땅치 않지만, 거절하는 것도, 덥고 피곤했다. 어쩌면, 조금은 궁금했을지도 모르고. 이상하게도, 그가 내 앞에서 그렇게 평온하게 웃고 있는 걸 보면 이 더운 여름 속에서 그가 던지는 말들만이 유일하게 선선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4시 반쯤에, 교문 동쪽 끝 정자에서 만나요. 해가 좀 기울 땐 그쪽이 제일 조용하거든요.”

 

 

그는 마지막까지 웃고 있었다. 그리고선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가 떠난 후에도, 그 자리에 무언가가 남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말 한마디 없는 공기. 손에 쥐어진 책 한 권. 조용한 복도 속 왠지 허무하게 자리 잡은 두 발자국. 그것들이 전부, 어쩐지 그가 의도한 무대 같았다.

 

 

해가 서쪽으로 조금씩 기울어갈 무렵, 나는 약속 장소로 향했다. 교문 동쪽 끝… 그곳엔 낡고 오래된 정자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고, 주변은 반쯤 자란 풀들로 덮여 있었다. 바닥은 약간 기울어 있었고, 나무 벤치 하나가 정자 한쪽에 길게 놓여 있었다. 멀리서는 매미가 울고, 가까이서는 누군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선배, 여기.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카류안이었다.

 

교복 윗단추를 잠근 채, 무릎 위에 책을 놓고 있었다. 그 옆에는 낯선 얼굴들이 몇몇 있었다. 대부분은 1학년이거나, 아니면 외부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생소한 얼굴들이었다.

 

 

“선배 왔어.”

 

 

그 말과 동시에, 몇 명이 고개를 돌렸다. 반응은 조용했고, 환영한다기보다 기다렸다는 듯한 느낌이 강했다. 그 조용한 공기가 부담스러워 왠지 앉기가 망설여지기도 했다. 나는 조심스레 다가갔고, 카류안의 옆자리에 조심히 앉았다. 벤치의 나무가 삐걱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 울림이, 내 귓속에서 이상하게 오래 맴돌았다.

 

 

“처음 왔으니까, 그냥 듣고만 있어도 돼요.”

 

 

그는 내게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대답도, 끄덕임도 없이 어쩐지 굳어버린 몸뚱이로 가지고 있던 책을 어눌하게 펼쳐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오늘은 각자 한 문장씩, 자신에게 걸린 문장을 고르는 날이거든요.”

“…걸리는 문장?”

“읽다가 멈추게 되는 문장 있잖아요. 본인 마음에 드는, 그런 거요.”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고, 쉬운 듯했지만, 실은 굉장히 애매했다. 나는 그저 주어진 책을 펼쳤다. 내용은 고전 산문집 같았다. 적당히 지루하고, 적당히 감성적이고, 적당히 관념적이었다. 한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책을 넘기는 소리와, 삐걱거리는 바닥의 소음, 그리고 해가 질 무렵이 다 되어 가고 있음에도 여전히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의 잡음이 섞여 흘렀다.

 

매미 소리는 더 이상 멀리 있지 않았다. 정자 기둥 어디에선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우렁차게 울려대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 울음이 뇌 속을 긁는 듯했고, 단어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

 

“데르온 선배.”

 

 

—갑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책을 덮고 나를 보고 있었다.

 

 

“고른 문장 있어요?”

“…아직.”

“그럼, 제가 먼저 읽을게요.”

 

 

그는 책을 펼치고, 아주 평온하게 문장을 읽었다.

 

 

「그치지 아니함은 형벌이 아니요, 너와 내가 하나 되는 은총이 된다.

너와 나는 함께 떨어지되, 푸른 하늘 안에서 영원히 머무르리라.」

 

 

카류안의 목소리는 낮고 뚜렷했다. 누구 하나 웃지도, 추임새를 넣지도 않았다. 그 문장이 공간에 박히고, 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쩐지, 다른 이들은 카류안이 말한 문장에 정신이 팔린 듯 다들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만 보고 있다.

 

그리고는 그는 별다른 감상평 없이 내게 덧붙여 이야기했다.

 

 

“선배도 다음에는 문장 하나를 골라 봐요.”

“…….”

“그게 여름을 시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새빨간 눈동자 속 까만 동공에는 내가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바라만 보는 내가. 나는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의 웃음에 대해 모르는 척했다. 그때는 단지, 그 여름의 시작점이라는 게 궁금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 모임은, 그날로 끝이었다. 나는 다시 나가지 않았다. 단지 ‘독서 모임’이라는 명목하에 몇 번 나가볼까, 하는 시도도 있었으나, 포기했다. 실패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갈만한 용기도, 의지도, 명목도 없었다. 카류안이 며칠에 한 번씩 ‘다음 주에는 꼭 오세요.’ 같은 메모를 보냈을 때도, 나는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카류안이 나를 마주칠 때마다 그 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점점 일이 귀찮아지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처음엔 그냥 불편했다. 정확히 뭐가 문제였는지 서술하기는 어렵지만, 그 정자의 공기, 정해진 듯한 순서, 그리고 문장을 고르지 못한 나를 똑바로 보던 그의 눈빛. …그것들이 하나하나, 그들만의 신호처럼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내게 남긴 메모에는 그런 문장이 있었다.

 

 

—오늘은 마지막 모임이에요. 선배가 꼭 참석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나는 그날도 여전히 참석하지 않았고, 답장을 보내지도 않았다.

 

여전히 별다를 것 없는 여름날이었다.

 

햇빛이 울렁이고, 태양 빛이 내리쬐는… 매미 소리가 귓가에서 떠나가지 않는… 그런 여름.

 

 

 

하지만 그다음 주부터 카류안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아무런 말이 없었고, 학생회에서도 다들 그가 학교에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한 별다른 얘기가 없었다. 교사들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고, 그저 나의 물음에도 다들 사정이 있겠지—라는 흐린 얘기뿐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말에 대해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조용히, 당연하다는 듯,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그의 빈 자리가 순식간에 덮여졌다. 아무도 묻지 않았고,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 여름방학이 시작됐다.

 

마을은 조용했다. 조용하다는 말로는 모자랄 만큼 정도가 지나칠 정도로, 소리라는 소리는 모두 누군가 가려놓는 것 같았다. 필요한 최소한의 소리가 허공에 떠 있는 기분이다. 멀리서 들려오는 매미 소리마저도 규칙적인 간격으로, 일정한 박자에 맞춰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기묘한 것은 또 있었다.

 

길가의 벽과 전봇대, 버스정류장, 슈퍼마켓 유리문, 그리고 오래된 폐가의 문짝까지. 길가에는 처음 보는 포스터들이 도배되어 있었다. 형식은 전부 제각각이었다. 어떤 것은 수채화 같은 하늘을 배경으로, 어떤 것은 날카로운 글씨체와 강렬한 색으로. 또 어떤 것은, 오래된 교회 주보나 낱장 광고처럼 세로로 줄지은 글씨와 장식 무늬로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모두 전혀 다른 모양새인데도 한 문구만큼은 변함없이 중앙에 박혀 있었다.

 

 

「여름 정화 주간에 참여해 주세요!

깨끗한 몸, 맑은 마음」

 

 

——여름 정화 주간.

 

단어들은 모두 무해했다. 오히려 여름방학의 문화 행사 같은 어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포스터의 배경은 어쩐지 너무 푸르고, 하늘색과 바다색의 경계가 뒤섞여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물 위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그 푸름 속에 오래 시선을 두면, 빛이 아닌 무언가가 천천히 나를 끌어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햇빛은 강했고 그림자는 짧았으며 사람 대신 바람이 땅 위를 가로질렀다. 하지만 그 바람마저도, 어쩐지 포스터 속 푸름과 같은 결을 가진 듯했다. 살갗 위로 스치는 것이 아니라, 안쪽 깊숙이 스며드는 바람이었다.

 

 

어른들도 다들 낮에는 말이 줄어들더니, 밤길은 일찍 닫혔다. 주택 단지 뒤편 작은 공원에서는 밤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은은한 음악이 흘러나왔고, 사람들이 모여서 촛불 같은 것을 들고 웅성거렸다. 어떤 일을 벌이기라도 하는 건지, 알 방도는 없었다. 누구도 묻지 않았고, 궁금해하지 않았다. 여름이니까. 그게 전부였다. 그 이들에게는 그게 전부였다.

 

여름방학이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둘씩 다들 휴가라는 명목으로 가게를 휴업하기 시작해 방학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밖으로 나가는 가치도 없어졌다.

 

이쯤에서야 이 마을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미도 울음을 잦게 멈췄다. 울렁거리는 햇빛은 기억나는데, 태양이 뜨거웠는지도 잘 모르겠다. 잔뜩 폐색된 세계에서 눅눅하게 달라붙는 공기들이 푸른 잎을 전부 갉아 먹고 온 세상의 수분을 빨아들이는 기분이었다.

 

아스팔트 위로 돌아다니는 자동차도, 사람도, 아무도 없다. 텅 빈 곳을 걸어가다, 문이 닫힌 슈퍼마켓의 포스터 문구를 가만히 바라보다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정상적으로 끊기듯 들리는 매미 소리를 의식했다. 온몸은 땀에 젖은 채로 녹아내리고 있는데, 피부는 왠지 싸늘하다.

 

 

그러던 어느 날엔, 매미 소리가 멈췄다. 라디오도 나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모든 것이 멈췄다. 매미는 우는 것을 멈췄고 라디오는 방송을 내보내는 것을 멈췄다. 나는 뜨거운 열기에 잠에서 깨어났고, 창밖이 이상할 정도로 환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방 밖으로 걸어나가 문을 열고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처음엔 몰랐다. 그것이 카류안이라는걸.

 

전봇대 아래, 희게 뜬 얼굴, 젖은 셔츠, 그리고 흠뻑 젖은 것처럼 손끝까지 번진 붉은 피.

 

비릿한 냄새가 집 안까지 퍼지는 기분이었다. 어디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의 몸을 안고 있다가 옮겨진 피 같았다.

 

 

“데르온.”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그 말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았다. 닫힌 문이 아니라, 이미 열린 문을 확인차 두드리는, 그런 오만한 목소리.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이.

 

 

“드디어 그대에게도 이 여름이 찾아왔구나.”

 

 

나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소리 내는 법을 잊은 것처럼,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몸이 식어가는 여름 한가운데에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은, 웃고 있었다.

 

정확히는, 무언가를 끝낸 사람의 눈빛이었다.

 

또는, 무언가를 시작하는 사람의.

 

 

정확히 그쯤이 몇 월이었는지, 여름이기는 했는지조차 모르겠다. 뜨거운 태양이 실제로 존재하긴 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하늘은 미친 듯이 파랗고, 바람은 숨이 막힐 듯이 뜨거웠다. 그리고, 점차 울려 퍼지는,

 

——아.

 

매미 소리.

 

끊기듯 들리던 매미 소리가 갑자기 지독하게 들린다. 울음이라기보다는, 짓이기는 소리 같았다. 의식하자마자 더욱 커지는 새벽의 시계 소리처럼 머릿속을 헤집는, 공기와 고막을 그대로 으깨는 소리.

 

나는 뛰었다.

 

뒤를 돌아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카류안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들리지 않는 척했다. 집의 뒤편 철문을 넘고, 녹슨 난간을 잡아 뒷산으로 연결된 오솔길을 그대로 달렸다. 발목이 꺾일 뻔했고, 땀이 눈을 찔렀다.

 

숨이 목에서 끊어질 듯 터져 나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멈추는 순간, 무언가가 내게 닿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매미는 여전히 울고 있다. 아니, 이제는 울부짖는 수준을 넘어섰다. 내 귀에만 그렇게 들리는 건지, 세상이 전부 미쳐버린 건지 알 수 없었다. 뒷산 중턱으로 이어지는 외길인 나무 계단으로 올라섰다.

 

나는 미끄러지듯 계단으로 몸을 날렸다. 등줄기로 땀이 흘렀고, 발끝이 풀 위에서 미끄러졌다. 마치, 이 여름 전체가 나를 삼키는 것 같다.

 

한 계단, 한 계단을 올랐다. 단 한 번만——

 

단 한 번만 저 언덕 너머로 도망치면 된다고 믿으며.

 

그러나 나는 멈춰섰다.

 

 

“데르온.”

 

 

——그 목소리에.

 

계단의 아래쪽, 나뭇잎에 그늘지지 않아 햇빛이 강하게 내려앉은 그곳에 카류안이 보란 듯 서 있었다. 피범벅이 된 모습으로 나를 본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나도 모르게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그의 셔츠는 더이상 하얗지 않고, 피가 말라붙은 자국과 흐른 자국이 뒤엉켜 있다. 입술과 목덜미, 손가락 마디와, 무릎까지 온통 붉은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린다. 뜨거운 바람에.

 

빛이 그를 감싸고 있다. 그건 후광이 아니라, 광기의 틀.

 

너무 밝아서 형체가 번지는, 정신이 끊어지기 직전의 빛.

 

 

그는 나를 보며 웃는다. 너무도 청량하게.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 웃음이 나를 무너뜨렸다. 숨이 막힌다. 위장이 뒤틀리고, 목구멍이 조여들어 온다. 뇌가 뒤집힐 듯 구토감이 올라온다. 울렁거림은 배가 아니라 머릿속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았다. 눈앞의 하늘이, 너무도 파랗게 터졌다.

 

그는 계단을 올라오지 않았다. 그저 그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햇살이 그를 비춘다. 피 위로 햇빛이 번지자, 진한 피비린내가 나는 기분이었다. 색이 사라진 붉음이다. 그때, 그가 내게 말했다.

 

 

“기억나나? 그대가 나한테 처음으로 웃어준 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맑게. 하지만 그 말이 닿는 순간, 나는 속이 확 뒤집혔다.

 

카류안이 말하는 것은, 웃음이라기보단 짜여진 친절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여름이라고 칭했다.

 

 

“나도, 그에 웃음으로 답했어. 내겐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

“…….”

“그게 내 여름이었고…”

“…….”

“내 신이었고, 계시였어.”

 

 

그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피로 얼룩진 손바닥이 빛을 받았다. 그건 마치 누군가를 부르는 신호, 혹은 누군가를 바치겠다는 의지 같았다.

 

 

“근데 너는 그 모든 것을 버렸지.”

“…난 아무것도 버린 적 없어.”

“데르온, 네게 시간은 충분히 주지 않았나?”

“시간이라니…….”

 

 

그 순간, 그의 오른손 안쪽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걸 보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본 것도, 알아차린 것도 아니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건 사람이 아니다. 저건, 인간이 만든 게 아니다.

 

 

“데르온. 여름은 무한해.”

 

우리는 어쩌면 하나의 여름 속에서 몇 번이고 반복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매년마다 말이야. 이 무한한 계절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너와 나밖에 없어. 정확히 말하면, 너를 품은 나밖에 없지.

 

 

그가 계단을 내디뎠다. 나는 그에 맞춰 조금씩, 더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숨이 목에 걸리고, 심장이 뒤틀렸다. 토할 것 같았다. 피 냄새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늘 때문이었나. 너무도 맑아서 토할 것 같은 하늘.

 

그가 계단을 오르자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매미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커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의식을 치르는 듯한 울부짖음. 광기가 서린 여름의 주술과도 같은.

 

붉은 눈동자가 내 앞에 멈춰 선다. 그는 나를 보며 그토록 오래 기다린 선물이라도 받는 것처럼 웃었다. 지독히도 순수하게, 때론 신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말이다.

 

 

“이제야 같이 여름에 닿았군.”

 

——그 말에, 매미 소리가 하나둘씩 멎은 것 같다.

 

 

그 계단에서 그는 모든 것을 끝내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말이 없던 그는, 핏자국을 휘감은 채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다.

 

어디로 가든 결국 여름이었다.

 

하늘이 새파랗고, 매미가 청량히 우는 여름.

 

이 세상의 끝은 오직 이 남자와 나, 그리고 이 계절뿐이었다.

 

 

발밑에서 계단이 삐걱거리고, 계단은 가장 높은 단의 끝에 이르렀다. 도망치지 않는다는 말보다, 도망칠 수 없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뒤는 낭떠러지, 바람은 위에서 아래로 불었다. 덥고 습한 바람이. 아무 냄새도 없다. 심지어 피 냄새의 비릿함조차도.

 

 

“데르온.”

 

 

그가 나를 불렀다. 내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는, 처음 들었을 때처럼 부드러웠던 것 같다. 하지만 똑같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다르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알고 있었다.

 

 

“너만이 이 여름을 가지고 있었어.”

 

 

알 수 없는 소리만 지껄이는 여름. 피가 말라붙은 손끝. 하지만 되려 따뜻해 보이는 손길.

 

거짓되고 무너진 신의 손.

 

 

“그러니 함께 가야 해.”

 

 

그 말은, 제안이 아니라 운명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았다.

 

 

“이 여름이 대체 뭐길래…….”

 

 

그의 손이 닿았고, 나의 마지막 한 마디로 우리는 함께 아래로, 여름의 끝으로 추락했다.

 

낙하 속에서 매미의 울음소리는 터져 나왔다. 끝까지 푸르게.

 

 

그 아래에서, 우리는 서로를 껴안은 채 사라졌다.

 

하늘 아래, 뼈와 살과 피와 숨이 뒤섞인 낙하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카류안의 체온을 느꼈다.

 

 

그는 웃고 있었다. 두 팔로 나를 끌어안은 채, 무너지는 몸으로 나를 감쌌다.

 

거꾸로 뒤집힌 하늘 속에서, 그의 웃음은… 차마 죄악이라 칭할 수 없었다.

 

 

 

 

†††

 

“데르온 선배.”

“…….”

“얼굴이 좀 낯설어요. 깊은 꿈이라도 꿨어요?”

 

 

창밖의 파란 하늘, 매미의 울음소리.

 

선풍기가 덜덜거리는 소음, 여름 낮의 교실 풍경.

 

모든 게 꿈이었다는 안도감이 드는 순간….

 

 

눈앞에 보여진 풍경은 너무나 정상적이라, 도리어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단정한 교복… 그는 물을 마시다가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추며 웃었다. 언제나처럼,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한 웃음을 말이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마치 오래전 장면 속에 다시 발을 디딘 것 같은 기분이 스쳤다.

 

 

“네가 이 교실에는 왜….”

“아, 다른 건 아니고요. 하나 물어볼 게 있어서요.”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교실 창문으로 들어온 빛이 그의 어깨를 타고 흘렀다. 햇살이 너무 맑아, 그가 서 있는 자리가 다른 계절처럼 보였다.

 

 

책상 위에는 책이 한 권 있었다.

 

제목이 흐릿한, 이름 모를 고전 소설책….

 

손끝이 표지를 스쳤을 때, 종이에서 묘한 습기와 먼지 냄새가 올라왔다.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 조용해졌다.

 

선풍기의 덜컹거림이 사라진 것도 같았고, 매미 소리가 더 가까워진 것도 같았다. 둘 중 어느 쪽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시선과 그의 시선이 맞물린 채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침묵이 길게 늘어졌다. 눈앞의 공기가 미묘하게 떨린다. 말 한마디 없는 그 시간이, 아마도 몇 초였을 것인데 내게는 한 계절만큼 길었다. 그러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있죠, 문장은 고르셨어요?”

 

 

순간 기억이 파도처럼 휩쓸렸다.

 

아니, 어쩌면 파도보다 더 느리고 무겁게, 밀려왔다.

 

 

 

우리는 어쩌면 하나의 여름에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다시,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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